쓰가루 쓰구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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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가루 쓰구아키라는 구마모토 번주 호소카와 나리아키의 아들로, 히로사키 번 11대 번주 쓰가루 유키쓰구의 데릴사위가 되어 그의 뒤를 이어 번주가 되었다. 그는 서양식 군비 증강을 추진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히로사키 제국 지사를 역임했다. 1884년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제15국립은행 이사로 재직하며 와카 시인으로 활동했다. 1916년 사망했으며, 양자인 쓰가루 히데마로가 그의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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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가루 쓰구아키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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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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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쓰가루 쓰구아키라 |
본명 | 호소카와 모리아키라 |
작위 | 백작 |
생몰 | 1840년 9월 7일 ~ 1916년 7월 19일 |
출생지 | 에도, 일본 |
사망지 | 도쿄, 일본 |
묘소 | 도쿄도다이토구야나카야나카 묘지 |
관직 | |
관위 | 종5위하・도사노카미, 엣추노카미, 종4위하・시종, 좌근위권소장, 종1위 |
주군 | 도쿠가와 이에모치→요시노부→메이지 천황 |
가계 | |
씨족 | 호소카와 씨→쓰가루 씨 |
아버지 | 호소카와 나리모리 |
어머니 | 아오키 진노스케 딸 |
양아버지 | 쓰가루 유키쓰구 |
형제자매 | 호소카와 요시마사, 호소카와 아키쿠니, 호소카와 모리히사, 쓰구아키라, 도모노조, 나가오카 모리미, 이사히메 등 |
배우자 | 정실: 쓰가루 유키쓰구 4녀・쓰네히메, 계실: 쓰가루 이네코 |
첩 | 다쓰, 아미 |
자녀 | 나라마로, 쓰가루 유키마사 부인, 히로코 |
양자 | 히데마로 |
다이묘 | |
신분 | [[파일:Japanese crest Tugaru Botann.svg|20px]] 히로사키번 12대 번주 |
섬긴 쇼군 | 쇼군 |
쇼군 목록 | 도쿠가와 이에모치 도쿠가와 요시노부 |
재임 시작 | 1859년 |
재임 종료 | 1868년 |
이전 번주 | 쓰가루 유키쓰구 |
이후 | 폐지 |
통치 | |
히로사키 현령 | 히로사키 현령 |
천황 | 메이지 천황 |
재임 시작 | 1869년 |
재임 종료 | 1871년 |
이름 | |
개명 | 간고로 (유명) → 호소카와 모리아키라 (초명) → 쓰가루 쓰구아키라 → 쓰구아키라 |
작위 정보 | |
쓰가루 백작가 당주 | 재임 시작: 1884년 재임 종료: 1916년 후임: 쓰가루 후사마로 |
2. 생애
규슈 구마모토번의 하위 영지인 우토번의 8대 다이묘였던 호소카와 나리모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안세이 4년(1857년) 6월 28일, 히로사키번 11대 번주 쓰가루 유키쓰구의 넷째 딸과 결혼하여 그의 후계자로 입적되었다.[1] 처음 이름은 '''호소카와 모리아키'''(細川護明)였으나, 장인 쓰가루 노부타카의 편휘를 받아 '''쓰가루 쓰구테루'''(津軽承烈)로 개명하고, 후에 '''쓰구아키라'''(承昭)로 이름을 바꾸었다. 같은 해 12월 16일, 종5위하 토사노카미에 임명되었고, 후에 에추노카미로 변경되었다. 안세이 5년(1858년) 11월 23일, 종4위하로 승진했다.
1859년 2월 7일, 쓰구아키라는 장인인 유키쓰구가 은퇴하면서 다이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선임자의 정책을 이어받아 영지의 군사력을 현대화하고 서구화하는 데 힘썼다. 쓰가루 번은 바쿠마츠 시대라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처음에는 삿초 동맹의 친 천황 세력에 가담하여 인근의 쇼나이번을 공격했다.[2][3] 그러나 얼마 후 도쿠가와 막부 지지 세력인 오우에쓰 열반 동맹으로 잠시 소속을 옮겼다가,[4] 몇 달 후, 명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 다시 동맹에서 탈퇴하여 천황파에 합류했고, 보신 전쟁에서 노헤지 전투와 하코다테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메이지 유신 편에 섰다.[2]
메이지 원년(1868년) 보신 전쟁에서 쓰구아키라는 처음에는 신정부에 따랐으나, 5월에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가했다.[4] 그러나 7월에 중앙의 정국 정보를 받고 관군에 협력하여 하코다테 전쟁 등에서 공적을 세웠고, 전후 신정부로부터 1만 석을 가증받았다.[2]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영지 제도가 폐지되면서 1869년부터 1871년까지 히로사키의 제국 지사로 임명되었고, 이후 아오모리현에 흡수되었다. 도쿄로 이주한 쓰구아키라는 1884년 화족 작위 제도가 제정되면서 백작 작위를 받았다. 공직에서 은퇴한 후에는 제15국립은행의 이사로 재직했으며, 와카 시로 유명했다. 1916년 도쿄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묘는 도쿄 타이토구에 있는 야나카 묘지에 있다.[2]
2. 1. 출생과 가계
규슈 구마모토번의 하위 영지인 우토번의 8대 다이묘였던 호소카와 나리모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안세이 4년(1857년) 6월 28일, 히로사키번 11대 번주 쓰가루 유키쓰구의 넷째 딸과 결혼하여 그의 후계자로 입적되었다.[1] 처음 이름은 '''호소카와 모리아키'''(細川護明)였으나, 장인 쓰가루 노부타카의 편휘를 받아 '''쓰가루 쓰구테루'''(津軽承烈)로 개명하고, 후에 '''쓰구아키라'''(承昭)로 이름을 바꾸었다. 같은 해 12월 16일, 종5위하 토사노카미에 임명되었고, 후에 에추노카미로 변경되었다. 안세이 5년(1858년) 11월 23일, 종4위하로 승진했다.2. 2. 히로사키 번주 시대
쓰가루 쓰구아키라는 규슈 구마모토번의 하위 영지인 우토번의 8대 다이묘였던 호소카와 나리모리의 넷째 아들이었다. 그는 히로사키번의 11대 다이묘였던 쓰가루 유키쓰구의 넷째 딸과 결혼하여 1857년에 그의 후계자로 입적되었다.[1]1859년 2월 7일, 쓰구아키라는 장인인 유키쓰구가 은퇴하면서 다이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선임자의 정책을 이어받아 영지의 군사력을 현대화하고 서구화하는 데 힘썼다. 쓰구아키라가 다이묘가 된 시기는 바쿠마츠 시대라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는데, 이때 쓰가루 씨족은 처음에는 삿초 동맹의 친 천황 세력에 가담하여 인근의 쇼나이번을 공격했다.[2][3] 그러나 얼마 후 쓰가루 번은 도쿠가와 막부 지지 세력인 오우에쓰 열반 동맹으로 잠시 소속을 옮겼다.[4] 몇 달 후, 명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 다시 동맹에서 탈퇴하여 천황파에 합류했고, 보신 전쟁에서 노헤지 전투와 하코다테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메이지 유신 편에 섰다.[2]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 폐번치현으로 영지 제도가 폐지되면서 쓰구아키라는 1871년까지 히로사키의 제국 지사로 임명되었고, 그 후 영토는 새로운 아오모리현에 흡수되었다.
2. 3. 보신 전쟁 시기
메이지 원년(1868년) 보신 전쟁에서 쓰가루 쓰구아키라는 처음에는 신정부에 따랐으나, 5월에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가했다.[4] 그러나 7월에 중앙의 정국 정보를 받고 관군에 협력하여 하코다테 전쟁 등에서 공적을 세웠고, 전후 신정부로부터 1만 석을 가증받았다.[2]2. 4.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영지 제도가 폐지되면서 쓰가루 쓰구아키라는 1869년부터 1871년까지 히로사키의 제국 지사로 임명되었으며, 그 시기에 영토는 새로운 아오모리현에 흡수되었다.[2]도쿄로 이주한 쓰구아키라는 1884년 화족 작위 제도가 제정되면서 백작 작위를 받았다. 공직에서 은퇴한 후에는 第十五国立銀行|다이주고코쿠리쓰긴코|제15국립은행일본어의 이사로 재직했으며, 와카 시로 유명했다. 1916년 도쿄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묘는 도쿄 타이토구에 있는 야나카 묘지에 있다.[2]
쓰가루 쓰구아키라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궁정 귀족인 고노에 타다후사의 차남을 입양하여 그의 후계자로 삼았으며, 그는 쓰가루 히데마루|쓰가루 히데마루|일본어 (1872–1919)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2. 5. 사망
메이지 17년(1884년)에 백작이 되었다. 그 후 제15국립은행 취체역을 역임하였다. 다이쇼 5년(1916년) 7월 19일, 77세로 사망했다. 양자인 히데마로 (고노에 타다후사의 차남)가 뒤를 이었다. 친아들인 나라마로는 분가하여 남작이 되었다.[1]3. 작위 및 서훈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호소카와 나리아키 |
어머니 | 아오키 진노스케의 딸 |
양아버지 | 쓰가루 노부유키 |
정실 | 죠히메, 메이코인 - 쓰가루 노부유키의 넷째 딸 |
계실 | 쓰가루 마사코 (1849년 - 1900년), 노부히메 - 고노에 타다히로의 여섯째 딸 |
측실 | 타츠 - 다나카 히코시로의 딸 |
측실 | 아미 - 이세야 만스케의 딸 |
생모 불명의 자녀 | |
양자 | |
증손 | 히사노미야 마사히토 친왕비 하나코 |
5. 기타
- 초대 번주 쓰가루 다메노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하사받아 역대 번주가 물려받은 다치 '도모나리'를 고쇼 신사에 기증했다.[8] 2020년 현재 이 다치는 신사 옆에 건설된 다카오카노모리 히로사키번 역사관에 소장되어 있다.
- 가루이자와에 지은 아메리카야 건축의 서양관 별장은 '신겐회 가루이자와 수도원'[9]으로 현존하고 있다. 단, 이 별장은 준공이 쓰구아키라 사후인 1918년경으로 여겨지므로[10], 사용한 것은 그의 가족으로 보인다. 또한, 증손녀인 하나코 (마사히토 친왕 비)도 소녀 시절부터 가루이자와에 자주 체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별장을 사용했는지는 불명하다.
참조
[1]
서적
Buke kazoku meiyoden
http://kindai.ndl.go[...]
Koyasu Nobushige
2008-07-17
[2]
문서
[3]
서적
Land and Lordship in Early Modern Japan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
[4]
문서
[5]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6-07-20
[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4-07-08
[7]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9-12-02
[8]
웹사이트
太刀 銘 友成作
http://hirosaki-bunk[...]
一般社団法人 弘前文化財保存技術協会
2020-10-02
[9]
웹사이트
神言会の修道院の一覧 軽井沢修道院
https://svdjpn.com/j[...]
神言会
[10]
논문
戦前期における軽井沢別荘地と洋風別荘の変容に関する研究
住総研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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